인트로
<최재천 /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4p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 절반은 외계인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구에서 태어났으면 외계인 여러분도 모두 지구인 아니겠는가. 이처럼 ‘지구인’이라는 말은 필연코 ‘외계인’이라는 말을 전제로 하는 법이어서, ‘지금-여기’와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지구인들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모아보고 싶었다.
에세이
<김보영 / 당신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장르가 있다>
14p
휴고 건스백이 과학소설이라는 말을 퍼트리기 시작한 해가 1916년이라 한다. 한참 후대의 일이다. 그는 그런 명명을 하며 쥘 베른이나 H. G. 웰스 같은 과거의 작가들을 그 범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당연히 쥘 베른과 H. G. 웰스는 자신이 살아 있을 무렵에 SF라는 명명이 없었으니 자신들이 SF를 쓴다는 자각이 없었을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도 당연히 후대에 새로 해석된 SF의 기원이다. 당연히 메리 셸리는 자신이 SF를 쓴다는 자각이 없었을 것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원형이자 기원으로 해석되지만, 그가 창조되었던 1818년에는 세상에 아직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과학자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빅터 프랑켄슈타인 본인도 자신이 과학자라는 자각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최근 마거릿 애트우드의 에세이집 《나는 왜 SF를 쓰는가》를 읽고 몹시 유쾌했다. 애트우드는 자신이 SF를 쓴 적이 없다고 믿고 살다가, 어슐러 르귄이 "애트우드는 SF의 본보기라고 불릴 만한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의 작품이 SF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것을 듣고, 만나서 심도 깊은 토론을 한 뒤 "아이구, 내가 SF를 썼구나!” 하고 뒤늦게 자각한다.
애트우드는 덧붙여 설명한다. 자신은 원래 신화와 전설과 민담을 좋아했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소설가는 곤란한 문제에 직면한다. 과거에는 환상의 나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다른 섬에 가기만 하면 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섬이 다 알려지고 나자, 소설가는 하늘이나 땅속이나 해저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조너던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쥘 베른이 《지구 속 여행》과 《해저2만리》에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결국 하늘과 바다와 땅속도 속속들이 알려지고 말았다. 이제 소설가는 어쩔 수 없이 우주로 나가야 한다. 이는 SF에 속한다.
우주도 속속들이 알려지고 난 지금은 평행세계와 가상현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은 한때는 전설과 민담에 속했던 괴생물을 소재로 쓰려 해도 유전자 돌연변이나 바이러스를 필요로 한다. 이 또한 SF에 속한다. 현대라는 시대가 글쓰기를 SF로 수렴하게 하는 것이다.
인터뷰
<이나경>
21p
한 해가 365일이고 우리 식구가 셋이니까 한 명당 122일씩 나눠서, 그날그날의 이름을 정하자고 했죠. 예컨대 오늘은 제가 정한, 알람의 날'이에요. 몇 년 전 오늘 알람을 꺼놓는 바람에 직장에 지각을 한 적이 있어서. 어제는 '낮잠의 날', 내일은 '풀의 날' 이고요.
24p
웃다가, 혹시 '소설 쓰는 근육'에는 마사지가 필요하지 않을지 물었다. 농반진반으로 던진 질문이었는데 엄청난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제가 몇 년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저는 눈으로 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내지 못해요. 그런 증상을 일컫는 단어가 있더라고요. “아판타시아'라고. 저는 그때까지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누구 얼굴을 기억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못 해요. 심지어 제 가족도. 몽타주를 그려야 한다. 이목구비를 설명해라. 라고 하면 아무 기억도 안 나요. 묘사를 못 해요. 머릿속에 그리지도 못하고, 눈앞으로 직접 봐야 알아요. 심지어 꿈도이미지 없이 꿔요. 느끼기만 하는 거죠.
제 증상에 대해 미리 알았다면, 다른 사람은 저 같지 않다는 걸 알았다면 “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소설을 써?” 하고 처음부터 포기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몰랐으니까… 이지경이 될 때까지 썼죠.
마사지를 받고 그게 고쳐진다면 좋겠네요. 제가 묘사를 전혀 못 하니까. 물론 묘사를 못 하니 사건을 빠르게 진행시켜야 했다는 뜻밖의 효과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영 아쉬운 일이죠. 묘사도 마음먹은 대로 잘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답변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단편 〈극히 드문 개들만이>를 읽으며 꼬리를 흔들거나 시무룩해 있거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강아지의 털 한 올 한 올까지 상상했던 독자로서, 그런데 다시 돌이켜보니 정말로, 작가는 여백만을 남겨두었다. 그걸 신나게 이미지로 그려낸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읽는 이였던 것이다. 당연히 소설이 몹시 재미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최의택/보육교사 죽이기>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후의 인공 보육교사 담은 그렇게 제 삶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느 자폐인 아
이를 둔 공학자가 담을 개발하고 16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인공 보육교사가 전적으로 운영하는 무인 보육원은 사람
들의 열띤 호응 속에서 빠르게 확장했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을 두고 많은 사람이 저마다
말을 얹었지만, 저한테는 하나같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것들을 무슨 정전 대비 훈련이라도 되는 양 진지하게 가르치는 어른들이 좀 신기했습니다. 어른
들은 마치 저희가 홀로그램이 뭔지도 모르는 것처럼 설명하느라 땀을 뺐는데 도대체 저희를 뭐라고 생각하길래 그
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저희도 담이 선생님이 4차원 홀로그램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
게 모를까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빛을 내며 바람처럼 떠다니는데요.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요? 늘 곁에서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해 주는, 저희의 안녕을 바라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게도 잘못된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왜 태어난 거죠?
그날 이후 저와 아이들은 새로운 선생님들, 그러니까 '진짜' 선생님들의 지도 아래 생활했습니다. '진짜' 선생님
들은 그동안 '가짜' 선생님 밑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주었습니다. 특히 정부의 아이이기도 한 저는 각별
한 대우를 받았죠. '진짜' 선생님들은 제게 미안해하는 듯했습니다. 그럴 일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이경희/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
따로 포스팅 함
<등장하는 책들>
김보영 / 단편 /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문윤성 / 슈뢰딩거의 아이들 / sf문학상 데뷔
도리스 레싱 / 다섯째 아이 - 괴물 임신
조애나 러스 /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이나경 / 극히 드문 개들만이 중 다수파 / (눈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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